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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션

추억 속의 캠퍼스 : 문리과대학 1946-1975 대외 공개

개요 정보
구분 캠퍼스 > 시기별
기간 1946.01.01 ~ 1975.02.28
개요
1946년 개교 당시 문리과대학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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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명

문리과대학의 위치

 


 
문리대 전경 (「대학신문」, 1957.11.4.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문리과대학이 위치한 동숭동 캠퍼스에는 개교 당시 법과대학과 예술대학 미술부가 함께 자리잡았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경성대학 법문학부가 위치한 동숭동 캠퍼스는 이후 서울대학교의 메인 캠퍼스 역할을 하였다. 경성대학의 법문학부 문과 계통과 이공학부 이과 계통의 통합 개편으로 이루어진 문리과대학은 문학부와 이학부로 편제되었다. 문학부는 동숭동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이학부는 청량리의 옛 경성제국대학 예과 건물에 위치하였다. 6·25 전쟁 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가교사를 열어 수업을 이어가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서울의 동숭동 본교사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1958년 8월에 이학부의 일부는 청량리 옛 교사로 다시 이전하였다. 이후 문리과대학 내 모든 학과가 동숭동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동숭동 문리과대학 전경 (1957)

 

 문리대 캠퍼스의 추억

".....2천 2백여의 학생과 6십여 교수진을 가진 문리대는 명실공히 서울대학의 중심이다. 낙산을 등지고 서 있는 3층 건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울대학 건재의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그 알뜰에는 봄이 되면 라일락의 강한 향기가 가득 차서 문리대의 명물임을 자랑한다. 초가을이 오면 파리의 거리와 따로 떨어질 수 없다는 마로니에가 이 문리대 앞뜰에서 열매를 떨어뜨리고 있기도 하다..." (「대학신문」, 1956.10.15.)

 

동숭동 캠퍼스의 추억을 이야기 할 때 즐겨 언급되는 상징물은 세느 강, 미라보 다리, 마로니에 나무였다. 대학본부와 문리과대학 앞에 흐르던 작은 개천은 '대학천'이라는 이름에서 언젠가부터 세느 강이라는 이국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여진 콘크리트 다리는 미라보 다리라고 불렸다. 봄이면 개나리, 가을이면 은행잎이 세느 강변을 줄지어 장식했고 주변의 경치는 그 명칭만큼이나 대학인들의 청춘과 낭만을 그려냈다. 그러나 세느 강은 낭만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위가 한창일 때 최루탄과 돌멩이가 오가던 곳이기도 했다.

 

   

                    문리과대학 앞 세느 강변 (1965)                  대학천의 모습 (「대학신문」, 1961.4.6.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문리대 교정에 서있던 마로니에 나무 역시 이국의 낭만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오랜 세월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마로니에 나무가 심어진 연원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경성제국대학 당시 불문학 강사였던 한 프랑스 신부가 고향에서 묘목 몇 그루를 심은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학생들은 마로니에 나무를 종종 대화 소재로 삼았고, 녹음이 우거질 때면 그늘에서 즐겨 쉬었으며, 가을이면 사랑의 열매라 부르던 마로니에를 따려고 했다.

 

 

     
마로니에 나무 (「대학신문」, 1961.6.1.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젊은 날의 기억은 마로니에 그늘에...

서울에서도 몇 그루 안되는 마로니에는 원래 발칸 반도를 원산지로 하고 있는 낙엽고목이다. 5~6월이 되면 흰색 바탕에 붉은 반점을 가진 길이 2cm 가량의 꽃들이 2~30cm의 곧은 가지에 주렁을 지어 조촐한 웃음을 짓는다. 유행의 본산 '빠리' 가로엔 마로니에가 줄줄이 서있어 한여름 도심을 가꾸어 주다지만 여기 캠퍼스 가든의 귀한 마로니에는 대학 생활의 상징인양 우리의 영혼을 가다듬어 줄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문을 거쳐나간 수많은 선인들은 마로니에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조촐한 향내와 시원한 그늘 속에 맺혔던 숱한 환희와 보람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대학가를 찾고 캠퍼스 가든을 되돌아보며 지난날의 아름다움과 성실한 앞날의 기약을 누구나 이제는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학신문」, 1961.6.1.)

 

문리대 캠퍼스의 양지바른 터 위에는  4·19 탑이 남쪽으로 서 있었다. 4월 혁명 1년 후 세워진 이 탑은 교수들과 교우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으로, 비석 모퉁이에는 오늘도 나는 정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라는 구절이 새겨졌다. 이것은  4·19 희생자 김치호가 남긴 일기장 속의 한 대목을 따온 것이었다. 그 후 기념탑의 정신을 따라 학생들은 정의와 용기를 끊임없이 되새겼으며, 4·19 기념탑 앞은 학생들이 모여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투쟁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그래서 '사건'이 일어나는 날에는 학생들과 기관원들 사이에 4·19 탑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눈싸움과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4·19 탑은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때 함께 옮겨졌다. 

 

문리대에 세워진 4·19 기념탑 (「대학신문」, 1973.4.16./1961.4.20.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40년사』, 198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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