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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역사기록물 콘텐츠 < 서울대학교 민주화의 길 2 > http://archives.snu.ac.kr:80/DAS/g.do?gidx=35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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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과 서울대학교(1960~1987) : 6월 항쟁 대외 공개

개요 정보
구분 역사적 사건 > 민주화
기간 1987.01.01 ~ 1987.06.30
개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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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명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전두환 정권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리던 민주화운동은 1987114일 서울대생 박종철(언어학과 84학번)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다시 결집하였다. 박종철의 죽음은 6·10 항쟁과 직선제 개헌의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1987114일 새벽, 경찰은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당시 민주화 추진위원회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의 소재를 캐내기 위해 폭행과 물고문을 자행했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이 사망하였다. 경찰은 처음에 "책상을 '' 치니 ''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사인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체 부검 결과 온몸에 고문 흔적이 분명하게 나타났고, 경찰관 2명이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시인했다. 정부는 다음날 내무부 장관과 치안 본부장을 경질했으나 이 정도로는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여러 단체와 학교들은 박종철 고문 사망에 대한 항의 집회와 시위를 115일부터 거행하였다. 120일 서울대에서는 '() 민주 투사 박종철 학우 추모제 및 살인 정권 타도를 위한 궐기 대회'가 열렸다. 서울대, 고려대, 중앙대, 건국대 등 전국 17개 대학에서 항의 시위가 진행되었던 23일부터 학생들의 시위 양상이 변화되었다. 대학별로 시위를 진행했던 것과는 달리 지역별로 여러 대학이 함께 연합시위를 벌였다. 27일에는 재야 단체를 중심으로 '() 박종철 국민추도위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27일 대규모 추모제를 명동성당에서 열기로 했다. 25일에는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서 4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총학생회 주최로 궐기대회를 열었고, 교수 100여 명도 애도식을 가졌다. 27일 명동성당 등 여러 성당과 일부 교회에서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을 울리며 추도식을 열었다. 추도회에 참여하려던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들의 봉쇄와 진압으로 인하여 상황이 어려워지자,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이날 전국 69곳에서 추도 집회가 열렸고, 798명이 연행되었다. 이후에도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이어져 나갔다. 226일 서울대 졸업식에서는 학생들이 박종철을 추모하는 리본을 달고 참석했으며, 문교부 장관의 축사 낭독 순서에 야유를 보내거나 등을 돌려 퇴장하는 등의 시위를 벌였다.

 

1월 20일 박종철 추모제 (「대학신문」, 1987.3.2.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2월 7일 박종철 국민추도회 (1987.1. 홍순민 기증)
 

27일 명동 추도회에서 최루탄에 쫓기는 군중들 (대학신문, 1987.3.2.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4·13 호헌 조치와 이한열 피격 사건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 조치는 개헌 논의를 중지하고 기존의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한다는 내용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향한 국민의 강력한 요구를 무시하는 조치였다. 4·13 호헌 발표 당일부터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이 시작되었다. 학계, 문화계, 종교계, 언론출판계, 노동단체, 농민, 학생 등 각계각층이 호헌 조치 반대 투쟁에 참여하였다. 422일부터는 교수들이 시국 서명을 발표하였다. 51일에는 서울대 교수 122명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여 호헌 조치를 정면으로 반박했으며, 총학생회도 57일 시국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약 2개월간 29개 대학의 교수 785명이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그러던 중 518,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고 전국적인 분노가 들끓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525일 무기한 수업 거부를 결정했다. 27일에는 학생 8,000여 명이 29일까지 동맹휴업을 결의했으며, 그중 2,000여 명이 신림동까지 진출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후 시위는 각 대학교로 확산되었다. 6월에는 각 대학 총학생회가 투쟁에 최대한의 역량을 동원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61일에는 13개 대학 총학생회장과 간부 20여 명이 모여 호헌 철폐와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5일에는 고려대생 500여 명이 20개 대학의 200여 명의 학생들과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철야농성을 했다. 6일에는 서울대, 연세대 등 서울 시내 29개 대학교 학생들이 연합 대동문화제에 모여 투쟁을 벌였다. 9일에는 전국 각 대학이 ‘6·10 규탄대회 총궐기를 위한 실천대회참가를 결의하는 출정식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의식불명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한열은 75일 숨졌다. 박종철의 죽음에 이은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으로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는 한꺼번에 폭발하였다.

 

서울대 총학생회 「아크로폴리스 제3호 기사 (1987.5.25.) 

 

 

한열이를 살려내라! 판화 (윤세철 기증)

 

6월 항쟁


1987610일 전국 각지에서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 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 대회가 열렸다. 서울대생 5천여 명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출정하여 시청, 한국은행, 서울역, 청계천 등지에서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전국적으로 22개 도시에서 24만여 명이 호헌 철폐독재 타도를 외쳤다. 학생들이 소리높여 호헌 철폐독재 타도를 외칠 때 주위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학생들을 지지했고, 주변 차량들도 도로를 메우고 경적을 울리며 시위에 가담했다. 이날 시위에는 전국적으로 22개 도시에서 24만여 명이 함께 했다. 611일 서울대, 경희대, 외국어대, 시립대 등 서울 시내 7개 대학교 천여 명의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진출해 농성을 벌였다. 특히 612일 명동 일대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거리로 나온 회사원들, 일명 넥타이부대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주변 상인과 시민들은 빵, , 약품, 의복 등을 전달하며 적극적인 호응과 박수를 보냈다. 610일의 범국민대회부터 연일 이어진 전국적인 시위는 6월 항쟁으로 발전해 갔다.

 

 

 

 

6·10 박종철군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대호 리플릿 (1987. 김철위 기증)


(좌) 6월 10일 남대문 시장 앞 시민들의 시위 모습과 (우) 6월 12일 명동성당 농성지원 시위 (대학신문, 1987.9.7.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618일에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등 전국 16개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 시위와 집회가 일제히 열렸다. 619일 학교 당국이 조기 방학을 결정했지만, 서울대 학생 1만여 명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집회를 갖은 후 교내 시위를 벌였다. 또한 자연과학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5천여 명이 도서관을 점거하고 그중 2천여 명은 철야 농성을 벌였다. 623일에는 서울 지역 25개 대학교 2만여 명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 모여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의 적극 참여를 결의하였다. 626일 평화 대행진 날, 시위는 정점에 올랐다. 전국 34개 도시 4개 군에서 140여만 명의 시민이 동시다발적으로 참가하였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4월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이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범국민적 시위였다. 서울대도 이날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 등 도심으로 진출하여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과 대치하였다.

 

6월 18일 아크로폴리스 최루탄 추방대회 출정식 (대학신문, 1987.9.7.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6월 26일 서울역 앞, 국민평화대행진 (대학신문, 1987.9.7.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20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500여만 명에 이르는 국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629일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6월 항쟁이 직선제 쟁취라는 큰 열매를 맺은 것이다. 학생운동은 4·19 혁명 이후 다시 한번 값진 승리를 거뒀으며,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성숙해졌다. 4·19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시민들의 혁명으로서, 정치 제도의 민주적 개혁이 자라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에서 6월 항쟁 이후를 '87년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박종철 열사 초혼장 (대학신문1989.3.2.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40년사」, 198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3 -서울의 봄부터 문민정부 수립까지-」, 돌베개, 201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2권 사회문화사」, 한울, 2020.

정진위,「1980년대 학생민주화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강의」, 한울, 2013.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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