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설명
■ 3선 개헌 반대운동
19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직의 3선 연임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결국 1967년 6·8 총선거에서 관권이 개입하고 수많은 선거 부정이 난무한 가운데 3선 개헌 가능 의석을 획득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는 6월 12일과 13일에 걸쳐 법대생과 문리대생들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고, 학생들의 연이은 시위와 성토대회는 9월까지 계속되었다. 대통령 선거를 2년 앞둔 1969년 6월, 박정희 정권은 본격적으로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였다. 학생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6월 12일 서울대 법대생 500여 명은 동숭동 교정의 합동강의실에서 3선 개헌에 반대하는 ‘헌정 수호 학생 총회’를 개최하고 반대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제 독아를 드러내기 시작한 3선 개헌의 음모를 반민주적인 행위로 단정하는데 주저치 않으며” “조국의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어떠한 반민주적인 행위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6월 17일에는 문리대생 200여 명이 4·19 기념탑 앞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3선 개헌 반대 집회를 시작했다. 19일에는 공대생 500여 명이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후 전국 각 대학교에서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성토대회와 가두시위를 연일 계속했다. 7월에 이르러 규모는 더욱 커져 7월 1일 8천여 명, 2일 6천여 명이 거리로 나가 경찰과 충돌하였다. 7월 2일 문리대생들은 3선 개헌 성토대회를 열어 '제3선언문'을 발표했으며, 법대생들도 '전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여 농민, 노동자, 각계각층의 지식인을 비롯해 여당 당원과 공무원들에게도 민주수호투쟁에 호응할 것을 호소했다. 7월 4일에는 600여 명의 공과대학 및 교양과정부 학생들이 중랑교까지 진출하여 연좌시위를 벌이다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 제3선언문
위정자들은 조국 근대화의 미명하에 다시금 독재 근성의 독아를 드러내어 전 민족을 압제 분열의 심연으로 실추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에게 민족적 양심과 각성을 촉구하고자 다시 이 자리에 모였다.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은 정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피의 투쟁의 역사였다.
민족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바친 선조들의 피의 얼을 우리는 얼마나 우러러 왔던가.
아! 민주시민들이여, 슬프다. 이제 우리의 민족역사는 다시금 새로운 피의 투쟁을 부른다.
저들을 보라!
추악한 정권욕을 허울 좋은 명분 아래 감추고 있는 저들의 생리를!
민주헌정의 파괴와 참 자유의 말살을 획책하여 역사 위에 더러운 오점을 남기려고 하는 반민주적 반민족적 세력의 음흉한 간계를!
저들의 언론탄압과 여론조작과 학원사찰 등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삼선개헌이란 혼란의 역사를 되풀이 하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들에겐 고귀했던 선열의 피가, 독재에 항거하여 피로서 자유를 쟁취하려한 4.19의 젊은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민주시민들이여!
우리의 혈관 속에는 생동하는 민족양심이 흐르고 있다.
우리의 가슴에는 모든 사회의 불의에 꿋꿋하게 항거하는 장렬한 의지가 샘 솟고 있다. 그 어떠한 반민족적 비민주적 세력도 이제 추호도 용납될 수 없다.
무엇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 삶의 참된 의미 이겠는가?
민족의 분열과 민족정신의 파괴를 초래하고 있는 그 어떠한 세력에 대해서도, 이의 분쇄를 위한 피의 투쟁은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인들의, 아니 역사를 호흡하고 역사의 발전을 지향하는 우리들 자신의 숭고한 의무이다.
우리는 수차 경고해 왔다.
이제 우리는 그 어리석은 삼선개헌 추진세력들에 대항하여 경고로서 그치려 하지 않겠다.
일어서자! 그리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 젊은 지성은, 우리의 민족양심은 삼선개헌 추진세력과의 여하한 피의 투쟁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1969.7.2.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대의원회
학생들은 9월 1일 개강과 동시에 시위를 재개하여 문리대생 300여 명이 비상 시국 선언문과 전국 대학 교수단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한 후 ‘3선개헌 결사 반대’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법대생들은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상대생들도 성토대회와 시위를 벌였다. 문리대, 법대, 상대는 곧바로 휴교에 들어갔다. 9월 2일과 4일 교양과정부와 공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휴교하였고 8일에는 사범대학도 휴교했다. 3선 개헌 반대운동이 격해지자, 개헌안 국회 표결 전날인 9월 13일까지 전국 33개 대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학교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 9월 14일 박정희 정권은 여당 단독 표결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국회는 개헌안과 함께 국민투표법(국민투표 대상이 되는 사안에 대한 찬반 운동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된 정당의 연설회에서만 가능)을 통과시켰다. 국민투표법은 대학생들의 3선 개헌 반대시위를 제압하는 법적 제약으로 작용했다.
휴교령으로 인해 (좌)굳게 닫힌 법대 정문과 (우) 텅빈 청량대의 벤치들 (「대학신문」, 1969.9.29.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3선개헌 반대 시위 휴교조치로 텅빈 도서관 (1969.9.22.)
이후 전국 각 대학과 일부 고등학교에서도 집회가 계속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은 학원에 경찰 병력을 투입하고 처벌과 탄압의 강도를 높이며 3선 개헌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9월 19일 전국의 9개 고등학교와 38개 대학교가 다시 휴교에 들어갔으며, 학생들을 구속하고 집회 및 반대 운동을 금지하는 등 반대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수단을 봉쇄해버렸다. 학생들은 10월 23일 학교가 전면 개강할 때까지 3선 개헌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3선 개헌 반대 운동은 민주주의를 내세워 민주적 정당성의 문제를 학생들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게 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획책에 대한 광범위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40년사』, 198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법대 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서울법대 학생운동사』, 블루프린트, 200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오제연, 「1953~1975년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전개와 양상」,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