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설명
■ 민족주의와 학생운동
4.19 혁명으로 고조된 민족주의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1962년 6월 미군의 한국인 폭행 문제로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각각 벌인 한미행정협정체결 촉구시위는 학생들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서울대 학생들은 1963년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결성하고 조직적으로 학생운동을 이어갔다. 특히 이들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한일회담을 굴욕외교라고 비난하고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 한일회담 반대운동 : 3·24 시위
박정희 정권은 해방 후 채 20년이 되기 전에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며 미국이 한일간의 조속한 타결을 종용하자,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1964년 2월 22일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안을 발표했다. 3억불의 청구권 보상과 평화선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이 교섭안 발표를 선두로 3월 5일 정부와 여당은 연석회의에서 한일협정의 타결, 조인, 비준을 모두 5월까지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야당인 신민당을 주축으로 한 재야세력들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를 결성하여 한일회담 즉시 중지와 일본의 반성 촉구 등의 내용을 담은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전국 유세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64년 3월 24일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의 주도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 5천여 명이 ‘중지하라 매국외교 박멸하라 매판세력’, ‘타도하자 매국괴뢰 궐기하라 일본지성’, ‘사수하자 평화선 타도하라 매국노’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한일회담 추진에 반대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문리대 학생들은 정부 측 한일회담 대표인 김종필을 '제2의 이완용'으로 규정하며 그의 허수아비 인형을 두고 화형식을 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1964년 3월 26일자 「대학신문」은 3월 24일 가두시위 현장 모습과 당시 문리대 게시판에 나붙은 선언문, 전국 대학생에 보내는 메시지 등을 실었다.
□ 3·24 선언문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압제하에서 피어린 항쟁을 통하여 전취한 해방조국의 민족자주성은 다시 제국주의적 일본독점자본의 독아에 박살되기 한걸음 직전에 있다. 이제 우리는 조국해방투쟁의 영용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조국이 부여하고 민족양심세력의 엄숙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일본독점자본의 교활한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새로운 투쟁대열 가운데서 자신을 발견하려 한다.
한국전쟁을 밑천으로 재기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전쟁상인들은 다시 한국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책동하고 있으며, 정부는 한국 어민의 생명선이며 국가존망의 국방선이며 한국 최대의 미개발보고인 평화선을 방해하여 36년간의 압제와 착취의 대가를 6억불로 흥정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제국주의자가 반세기에 걸쳐 한국을 강점하면서 백만장정을 징용으로, 군대로, 노예노동으로 강제사역시키고 민족문화의 재보를 착취해가고 마지막 순간까지 금괴를 도탈해가고 은행권을 난발하는 단말마의 발악을 자행하던 대가이다.
무상원조, 어업협력, 정부차관, 민간차관 등등의 허다한 조건이 붙은 6억불이 일본제국주의가 음모와 학살과 억압으로 한국을 병참기지로, 상품시장으로, 식량보급지로 착취해 간 제국주의자들의 반성이다. 민족문화를 절변시키고 오늘의 이 빈곤을 강요하는 파행적 경제구조를 남겼고 살인적 정치탄압을 자행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참회가 이 위장된 6억불이란 말인가?
이제 일본제국주의는 새로운 독점시장과 수탈의 광장을 찾아 다시 흉악한 독아를 들어내고 있다. 반세기 전 일본 관헌의 총검의 협박과 위하 속에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던 일본제국주의 전쟁상인들은 또 하나의 보호조약-갑진년 대한민국 매매조약-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 피어린 항쟁으로 해방된 조국 자주민족의 양심은 이 또 하나의 이완용을 애국자로 표창할 것인가? 매국노로 처형할 것인가?
현재와 같은 유치한 단계의 한국어업이 거대한 일본자본에 예속되고 양보된 평화선 내에서 2년 이내에 어업협력조의 2억불을 되찾아 갈 수 있으며, 벌써 국내상품을 압도하는 제국주의의 상표는 취약한 민족자본을 잠식 예속시켜 저들의 매판자본화하며, 일본독점자본의 저속한 광고문화는 민족의식을 마비시키고 민족문화의 맹아를 말살하게 됨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닌가? 이러한 경제·문화 사회 전반적인 예속관계 하에서 정부는 민족의 주체성을 약속할 수 있는가? 한일회담 조기 타결을 서두르는 정부는 과연 민족의 주체성을 보장하기 위한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것은 민족주체성을 성명하는 정부의 입버릇처럼 명백한 기만이다. 민족의 이익과 긍지를 배반하고 모든 민족적 양심의 반대 속에도 굴욕외교를 강행하는 정부가 일본자본의 시녀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이제 민족의 양심적 자주역량은 일본제국주의의 독아로 조국을 유인하는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과학적 근거에서 청구권이 수락되고 대등한 입장에서 국교를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여하한 형태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도 한국민족은 항구적이며 거족적인 반대투쟁을 계속할 것이며, 제국주의자를 타도하고 그 음흉한 음모를 분쇄하는 성스러운 민족자주독립의 전열 속에 양심적 민족영양은 대오를 정비한다. 민족의 해방과 자립은 그를 다해서 투쟁하는 민족에게만 주어진 영광이며 이것만이 민족의 번영과 민족사에 전진을 약속하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한다.
민족양심의 표현과 정의의 실천을 우리들 생애의 필연성으로 자각해온 우리는 이 엄숙한 민족자립을 위한 투쟁대열을 과감스러이 전진시킬 것이다.
전진하는 민족사는 우리를 정의의 편으로 옹호할 것이며 제국주의자에 반대하는 모든 민족자주영양은 우리를 열열히 성원할 것이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 제국주의자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 (「대학신문」, 1964.3.26.)
□ 전국 대학생에 보내는 메시지
친애하는 전국대학생 여러분!
우리는 오늘 민족적 양심의 엄숙한 명령을 받들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매국적 정부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치욕스런 외교협상을 폭로하고 분쇄하기 위해 궐기한 것입니다. 6억불의 청구권이란 민족의 자주적 양심으로는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굴욕적인 것이며, 평화선을 이러한 치욕적 흥정을 위한 희생들로 양보하려는 기도는 여하한 명목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매국적 행위이며 음흉한 흥정을 모의하고 있는 일본 자민당정부는 바로 일본의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의 성실한 앞자비인 것입니다. 정부의 엄호를 받으며 침투하는 일본자본이 멀지않은 장래에 국내기업을 저들의 매판자본화하여 한국은 제국주의자들의 상업이윤에 봉사하는 충실한 예속독점 시장으로 전락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편 벌써부터 상륙하기 시작한 저속한 왜색문화를 압살할 것입니다. 민족의 양심인 전국대학생 여러분. 우리는 이같은 일본제국주의자와 이들에 예속의 길로 활로는 찾는 공화당정부의 매국적 외교를 반대하기 위하여 민족적 양심을 대변하는 것이니 전국대학생들의 열열한 지원이 있을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 제국주의자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 (「대학신문」, 1964.3.26.)
5월 20일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서울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등 5개 학교 학생 4천여 명이 모여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열었다. 또한 문리대 학생회는 5월 30일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고, 시위 주도 학생에 대한 징계와 정부의 반민주적 처사를 규탄한 뒤 집단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 한일회담 반대운동 : 6·3 항쟁
학생들은 6월 3일 각 단과대학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오전 10시 30분 치대생 200여 명이 시청 앞에서 시위한 것을 비롯해 의과대학, 농과대학, 상과대학, 사범대학, 음악대학, 약학대학 등 2천여 명의 학생이 각양각색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누볐다. 단식 중이던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와 종로5가로 향했고 법대생 200여 명이 합류했다. 수원에 있는 농대생 500여 명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저지하는 경찰들을 피해 수원에서 서울까지 100리 길을 도보 행군한 끝에 서울 중앙청 앞에 도착했다. 이날 서울대뿐 아니라 18개 대학교 1만여 명의 학생들이 함께 시위에 나섰다. 구호도 '박정희 정권 하야'로 모아졌다. 시위대는 중앙청으로 진출한 뒤 다시 청와대 쪽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밤 9시 40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이날의 대규모 시위가 바로 '6·3 항쟁'이다. 박정희 정권은 6·3항쟁의 책임을 물어 서울대학교 총장을 경질했다.
계엄 후 폐쇄된 문리대 교정 (「대학신문」, 1965.6.7.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 해를 이어 지속되는 한일협정 반대운동
계엄령 이후 긴 겨울을 보낸 학생들은 1965년 4월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였다. 1964년이 문리대가 중심이었다면 1965년은 법대가 중심이었다. 정부가 1965년 4월 3일 한일협정을 가(假)조인하자, 4월 10일 법대 학생 500여 명은 '매국노외교 반대 성토대회'를 가진 후 가두시위를 벌였다. 4월 15~17일에도 법과대학, 상과대학, 사범대학 등에서 연달아 단식투쟁과 성토대회가 열렸다. 5월 들어 다시 각 단과대학에서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이어졌으며, 6월 14일 법과대학 학생 232명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에 더하여 문리과대학 63명, 상과대학 320명, 사범대학 20명이 추가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한일협정 정식 조인을 하루 앞둔 21일 서울대학교 등 시내 12개 대학교 및 3개 고등학교 학생 1만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한일협정이 체결된 22일에는 13개 대학이 단식농성과 시위를 계속했다. 하지만 경찰의 대규모 진압 작전으로 캠퍼스 내에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학생운동 사상 전무후무한 200시간 단식농성도 혈서 작성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 조인 후 비준반대운동, 비준무효화운동이 이어졌다. 7월 3일 의대생 200여 명은 ‘한일 협정 비준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고, 8월 17일 서울대 법대 학생회는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선언식을 열었다. 이후 24일과 25일에도 문리과대학 앞에서 성토대회와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정부는 1965년 8월 26일 서울에 위수령을 내려 군대를 동원해 학생 시위를 진압했다. 다음날 정부는 학원 혼란의 책임을 물어 1964년에 이어 또다시 서울대학교 총장을 경질했다. 학교 전체가 29일부터 휴교에 들어갔으며 2년에 걸친 한일회담 반대 운동은 막을 내렸다. 6·3 항쟁은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로, 학생 운동이 민족 민주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40년사』, 198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오제연, 「1953~1975년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전개와 양상」,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2권 사회문화사』, 한울, 2020.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