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설명
■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출발
6·25 전쟁 기간 중 임시수도 부산으로 내려갔던 서울대는 1953년 가을 학기부터 서울대 본부와 문리과 대학을 시작으로 서울 캠퍼스에 복귀했다. 그러나 서울 캠퍼스에 남은 전쟁의 상흔은 매우 깊었다. 인적, 물적 기반이 파괴되어 학교 재건을 위해서는 상당한 재정이 필요했지만, 당시 정부의 재정 여건은 열악했고 교육 분야에 충분한 지원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6·25 전쟁 이전 문교부 예산은 정부 예산의 11.4%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전쟁 발발 후 1952년에는 2.0%, 1953년에는 2.6%에 불과했다. 서울대 최규남 총장은 직접 해외 원조기구와 접촉하여 재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서울대와 미국 대외활동본부(FOA)는 1954년 공학, 농학, 의학 등의 분야에 걸친 원조협정을 체결했다. 원조 계획의 실행은 미국의 미네소타대학교가 맡게 되었다. 미네소타대학이 선정된 배경으로는 공학, 농학, 의학 분야의 우수성, 당시 대외활동본부(FOA)의 책임자였던 스테슨(Harold Stassen)이 미네소타대학 졸업생이자 미네소타 주지사 출신으로 국제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을 엿볼 수 있다. 1954년 8월 1일 미네소타대학 교육학과 교수 타일러(Tracy F. Tyler)가 미네소타대학 캠퍼스 측의 사업 총괄 조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9월 5일에는 미네소타대학 임학과 부교수 슈나이더(Arthur E. Schneider)가 서울대학교에서 사업을 총괄할 수석자문관으로 임명되었다. 1954년 9월 28일, 3개년 동안 공대, 농대, 의대 등 3개 단과대학에 교수진 연수 프로그램, 시설복구, 장비지원 등 18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한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당시 공대, 농대, 의대에 지원을 집중한 이유는 이 3개 분야가 한국 사회와 경제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영역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수차례 계약 연장이 논의된 결과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총 545만 1,000달러를 지원받았다. 행정대학원은 1957년부터 지원 프로그램에 추가되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의 주재로 1961년 9월 28일까지 연장되었고, 추가 지원받은 434만 달러를 공대, 농대, 의대 외의 다른 단과대학의 발전을 위해 투자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했던 최규남 총장은 훗날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내가 이 사업을 추진시킨 주목적은 이 원조를 통해서 서울대학교를 장차 등지고 나갈 유능한 지도자를 양성하자는 데에서였다. 그러므로 물론 교수도 많이 파견하여 시찰 연구케 할 것이지만 우리 대학의 졸업생-서울대학교를 나온 우수한 청년들을 3년 혹은 4년 동안 장기간 유학시켜 충분히 연구시킨 뒤 다시 모교로 돌아오게 하여 서울대학교의 지도자가 되겠금 하려는 것이 내 마음이다.” (「대학신문」, 1954.9.15.)